팽목기억예술마당 일흔한번째

팽목기억예술마당 일흔한번째

지난 달 기상이 좋지 않아 기억캠프가 취소 되었고 이번달 일흔한번째 기억예술마당과 팽목기억순례가 휴가철 맞아 팽목을 찾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공연으로 오는 2022년 7월 30일 이어집니다.

우리사회는 2014년 이후에도 매일 크고작은 사고가 일어나면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처럼 사람들의 관심이 양은냄비처럼 끓어오르다가 식어버리면 당사자들만 고통속에 살아가지만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며 다람쥐 채바퀴 돌아가듯 참사의 희생자들은 잊혀져 버립니다.

불안한 사회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각종 재난에서 반면교사하지 못하니 재난이 발생하면 컨트롤타워는 지휘하며 인명을 구하고 발빠르게 대처하는 것 같지만 그 책임을 회피하려고 여론을 조작하고 피해자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나 진상규명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우리사회가 진심으로 책임있게 피해자를 구조하고 희생 가족들의 정상 회복을 위해 활동하고 지원한다면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될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사고의 원인과 책임에 따른 명확한 결론이 없이 희지부지하고 보통사람들 기억속에서 잊혀지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대형참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참사에 대한 기억을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곳인 팽목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의 세상은 달라져야 하기에 우리는 기억예술마당과 기억순례를 통해서 참사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도록 되새김하며 약속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억예술마당 안내 및 기억순례 신청]

○일시 : 2022년 7월30일(토) 오후 4시 16분

○장소 : 세월호 팽목 기억관 앞

○문의 : O1O-8957-0350 (팽목기억순례 참가자 신청)

세월호 참사를 내다본 시 노래 외양간(편집2015년)

팽목항 기다림과 기억예술마당 64

팽목항 기다림과 기억예술마당 64번째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에 열고 있는‘기다림과 기억예술마당’은 2015년 6월 27일 시작으로 세월호 인양과 미수습자‘기다림의 공연’ 23회와 세월호 인양후 잊지 않기 위한 ‘기억예술마당’40회를 열고 2020년 11월 28일 ‘팽목항 기다림과 기억예술마당’ 64번째를 열고자 전국예술인들이 모입니다.

세월호 참사 관련자 처벌 할 수 있는 공소시효가 5개월 남짓으로 진상조사나 관련자 처벌이 되지 않는다면 제2의 세월호 참사는 일어날 수 밖에 없어 미래세대를 위해서라도 반면교사 하고자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결코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기다림과 기억예술마당’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최근 광주 전남지역 코로나19(COVID-19) 3차 확산으로 일정 규모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자제토록 하는 범국가적 대응에 동참하여 감염병 확산 방지와 방문객 안전을 도모코자 철저한 방역 지침을 지키면서 비대면 공연(생방송 주소 2014416.com )으로 이어갑니다.

오는 11월 28일 토요일 오후3시16분 팽목항 세월호 기억관 앞에서‘팽목항 기다림과 기억예술마당 예순네번째’를 감염병 예방차원에서 많은 분들이 참석 못하겠지만 생활거리두기를 하면서 소수라도 함께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팽목항이라는 참사의 현장을 외면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것이 맞는지 구심점이 되어야 할곳이 참사의 현장 팽목항이 되어야 힘을 받을 수 있을 테지만 그것을 사람들은 모르는것 같습니다.

세월호 피해자들은 각자 다른 의미로 사회를 바라보고 있겠지만 세월호 참사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처럼 여러분들중에서 한분쯤 한 가운데에서 보거나 우리 옆에 있을수 있었던 분들입니다.

현재 우리는 세월호 참사에서 강약은 다를지라도 피해자로서 유가족은 아니지만 함께 투쟁한 시간이 6년을 지나 40년, 50년이 될지도 모르는 마지막 골든타임 기로에 서있다고 봅니다.

지금은 피해자들 끼리 갈라치기 되고 있으나 사람들은 모두가 세월호 피해자들이고 유산이며 과거와 미래에도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여기고 있으니 서로가 외면하면 안됩니다.

과거 수많은 사회적 참사 조사에서 시간만 흘려 보내 모든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도 무용지물이 되는 것처럼 현재도 유가족들은 항상 죄인처럼 이세상을 떠돌아 살아 가는 중입니다.

세월호 참사 뿐아니라 모든 사회적 참사에서 우리는 집단화된 조직들에 의해 갈라치기 되고 그 틈에 끼지 못하면 피해자들과 분리시키며 갈라치기 되는 상황들을 목도 해 왔습니다.

수많은 대형 참사 현장에서 여러 주장이 있고 다르다는 이유로 참사 희생자들 끼리 분열되고 갈라치기가 되고 다른 주장이라 하여 집단에 끼지 못하면 외면하는 건 마찬가지 인것 같습니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마찬가지로 트라우마로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한 지역주민등 수많은 주류에서 벗어난 비주류 세월호의 피해자들이 있음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희생자를 재물로 요구하고 조직화된 주류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은 반대세력으로 쳐 내오고 있으며, 조직화된 여러 집단으로 부터 격리되고 매장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수많은 참사에서 겪였던 시행착오에 대해서 지금도 목격하며 살고 있으니 현장의 목소리를 허심탄해하게 듣고 무엇을 주장하는지 들어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팽목항 기다림과 기억예술마당 64번째 비대면 생방송 시청 할수 있는 주소로 2014416.com 2014416.net 2014416.co.kr 2014416.kr 미리 구독과 알림 하시면 28일 3시15분 부터 시청 하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지난 9월26일 기억예술마당 62번째 녹화 방송주소 : https://youtu.be/wTQRs4m7KCA 와 10월31일 기억예술마당 63번째 녹화 방송주소 : https://youtu.be/bbln1yePuGA

📺 유튜브 방송주소 : 시민밴드 ‘언제나 봄’ 유튜브 채널주소 https://www.youtube.com/channel/UC7ICyKtJAGP8G_Z1ehzZnBQ

📱 SNS 방송주소 : 페이스북 한국의섬 https://www.facebook.com/koreaislands

진도동학농민군 후손을 찾습니다.

동학(東學)의 종교조직을 이용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개혁지도자를 중심으로 농민·도시민·소상인·몰락양반·이서 등 봉건사회 해체과정에서 몰락한 계층이 광범하게 참여한 반제·반봉건 근대화 투쟁운동으로 1894년 농민전쟁·동학난·동학 혁명·동학혁명운동·동학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농민전쟁의 진원지인 호남지방은 전통적으로 대지주에 의한 봉건적 수탈이 심하고, 강경·법성포·줄포·논산포 등의 포구·개항장은 대일 미곡수출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미곡무역에 편승한 지주층의 지주제 강화로 인해 소농·빈농층이 몰락했으며, 농촌사회 내부의 분화 및 계급대립이 전면에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의 교세가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봉건사회를 변혁하려는 일군의 혁명적 지식인들과 결합하게 되었다. 호남지역에서는 유형원의 학문적 전통을 잇는 부안(扶安) 동림서원(東林書院)과 오랫동안 강진에 유배되었던 다산 정약용 등 실학자의 진보적 사상이 암암리에 몰락양반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유포되고 있었다.

농민전쟁의 지도자인 전봉준도 그중의 한 인물이다. 이들은 기존의 군현단위의 농민봉기가 가진 지방적 분산성을 극복하고 체제개혁을 위한 대규모 농민전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각지의 농민들을 조직·동원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광범위하게 교세를 확장하던 동학조직을 주목했다.

동학(東學)은 몰락양반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을 통하여 만민평등의 지상천국을 건설하려 했다. 동학의 이념을 실현하는 방법으로는 ‘무위이화'(無爲而化)라는 관념적 차원에 머물렀으나 만민평등의 원리를 기반으로 한 반봉건 의식과 척왜양(斥倭洋)이라는 반침략의 민족 논리를 바탕으로 깔고 있었다.

동학교단은 1892년 11월 삼례집회와 1893년 3월 보은집회에서 교조신원운동이라는 종교적 운동을 벌였다. 이때 전봉준 등 남접세력은 동학조직을 이용하여 농민군을 결집시키고 민족적·계급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혁명을 기도했다. 이들은 교조신원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금구집회(1893. 3)를 소집, ‘척왜척양'(斥倭斥洋)과 ‘수령의 불법 침학 반대’를 외치면서 사회혁명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특히, 동학이 처음 진도에 들어온 시기는 1892년 1월께 나주출신 나치현으로 진도동학 교세는 다음해인 1893년 충청도 보은집회를 계기로 크게 확산되었으며 1894년 5월께는 동학농민군지도자 박중진, 김수종, 나치현 등이 이끄는 농민군이 진도부를 점령, 집강소를 설치하고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렇듯 진도동학농민혁명군의 기세가 인근 목포, 장흥, 나주, 무안 등지까기 확산되어 영향을 끼치며, 연합농민군부대를 편성해 반봉건, 근대화, 반외세 및 자주화를 위한 혁명을 이뤄 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진도동학농민혁명군이 1894년 11월 공주 우금타 전투와 12월 장흥 석대 전투에서 패배 후 진도로 집결, 진도농민군과 연합하여 남하한 조선정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최후 항쟁을 벌인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최후 항쟁지이며 동학군의 처형장소인 진도군 진도읍 송현 마을에 역사공원 및 전시관 건립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진도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 유골은 1906년 9월 일제 통감부 권업모범장 목포출장소 직원인 ‘사토 마사지로’가 진도에서 도굴해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유골에는 “한국 동학당 수괴 수급”이라 쓰여 있고, 별도 메모에 “촉루(해골) 명치 27년(1894) 한국 동학당 봉기가 있었다.

지도자 유골은 1995년 7월 일본 북해도대학 인류학 창고에서 발견된 것으로 아이누족 인권단체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일본 언론에서 보도하여 한국에도 알려지게 되어 이후 외교통상부와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유골 봉환을 요구했습니다.

진도군이 전주지방법원에‘유골현상변경금지 가처분 신청’을 2019년 5월 22일 제기했으나 5월 28일 기각하여 전주에 진도동학농민혁명군 유골이 안치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란으로 농민군은 폭도로 지난 110여년 간 규정되어 왔습니다.

전라남도 진도는 그들이 가장 창궐했던 곳이었는데 그들을 평정하고 돌아올 무렵에 그 수창자 수백명을 죽여서 시체가 길을 가로막고 있을 정도였다. 수괴자는 효수하였는데 이 촉루는 그 가운데 하나로 그 섬을 시찰할 때 채집한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민족정기를 세우고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한 자와 그들 후손의 명예 회복을 목적하여 제정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2004년 9월부터 시행되어 왔음에도 본 법의 취지와는 달리 지난 15년 동안 관계 부처, 전주시측은 유골에 대한 권리만을 주장하며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1996년 5월 유골을 한국에 봉환하여 곡절 끝에 전주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보관해 오던 중 2015년 2월 화장 후 매장한다하여 진도군, 진도군의회, 진도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동학 학술단체, 시민단체 등이 화장을 반대하고 진도에 봉환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전주기념사업회와 전주시는 유골 반환을 거부하고 전주에 2015년 4월 16일 매장한다고 공표하여 이에 대해서도 진도군 등은 반대하며 후손을 찾는 유전자 감식을 위해 유골의 보전과 진도군에 봉환해 줄 것을 누차 요구했었습니다.

전주시측은 유골에 대해 ‘역사문화벨트조성사업’을 계획하여 4년이 지나서 전주동학농민혁명 녹두관에 2019년 6월 1일 안장하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현재까지 역사기록과 연구조사에 나타난 동학농민혁명 지도자급의 진도 사람은 15명입니다.

진도 사람 15명 고인들의 넋을 기리고 진도인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도 각 문중의 호적, 족보와 구전 등 자료를 수소문 하는 바, 진도동학농민혁명군 진도 봉환에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동참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진도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공동대표 박주언 o1o-6255-5815, 박영상 o1o-7170-3200, 사무국장 조성문 o1o-2662-1392, 홍보담당 박준영 o1o-2934-3119 연락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