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도에 뿌리 내린 천주교 역사

 

우리지역은 돌도끼, 돌화살촉, 돌칼, 빗살무늬토기등 석기시대 고인돌, 지석묘와 고려때 무덤들도 발견되었으나 왜적과 해적들로 인하여 공도가 되었다가 임진왜란(1598년)이후1600년부터 입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서남해 섬지역에서 선조들이 늦게 입도한 지역이지만 1866년 무안 몽탄 박원기 부부가 동구리 668번지에서 살면서 전교를 시작하고 신자 장봉헌이 창유리697번지에 초가 3칸을 건축 선교당으로 시작되어 유교전통사회에서 육지와 단절된 섬특성상 카톨릭 정착이 가능했을 것으로 본다. 

이후 1898년 목포 산정동 초대 프랑스신부(도예)(1898~1909)가 판공성사 차 제주에 갔다 오다 풍랑으로 현재 마리아상이 세워진 동구공소터에 머물면서 1900년 조도 창리, 동구리, 지산 인지리에 공소를 개설함으로써 카톨릭 전파가 본격화 되었다.

2002년 성 유진길(아우구스티노)성당은 의신, 군내, 고군, 조도(9개공소) 공소를 통합한 성당으로 승격하여 초대 이준한(토마)신부를 시작으로 제2의 카톨릭 부흥이 일어나면서 조도에서 카톨릭은 뿌리깊게 이어지고 있다.

팽목항 세월호 기억예술마당

광주·전남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 진실 규명을 위한 30일 오후 3시 기억예술마당, 31일 오후 4시16분 해넘이굿, 1일 오전 7시 해맞이굿을 사흘에 걸쳐 연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바라는 지역 예술인과 교사, 문화단체 등이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진도 팽목항 등대 앞에서 여는 기원행사로 이번이 아홉번째다.

전교조 진도지회 고재성선생님은 “팽목에는 아직도 유가족 우재아빠가 계십니다.”며, “팽목항 등대에서는 팽목항 기억예술마당을 진실이 밝혀지고 책임자들이 쏵 다 처벌당하는 날까지 계속 합니다.”라고 많은 분들이 함께하기 바라고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있고 2015년 세월호 선체의 조속한 인양을 바라는 기다림의 공연을 23번째 인양후 진상규명을 바라는 9번째 기억예술마당을 열고 있는 가운데 팽목항은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진 지금 공사가 진척되면 가족식당과 분향소를 몰아내려 할 것이라 우리는 연대하여 팽목항 참사의 현장을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것이다.

이번 사흘간 열리는 팽목항문화제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남지부와 진도민주단체연석회의, 진도민주단체연석회의, 광주시민상주모임 ‘예술인행동 장’, 한울남도아이쿱, 한국민족춤협회 등이 공동 주관한다.

다도해 유구한 역사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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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단일면으로도 가장 많은 178개(유35개,무143개)로 이루어져 흔히‘새떼’처럼 섬이 흩여진 곳이라 조도(鳥島)이며, 조선시대 행정구역이름은 여러섬이란 뜻의 제도면(諸島面)이었으나 1895년 비로소 지금의 행정구역 이름인 조도면(鳥島面)로 변경되었다.

조도면 섬에서는 석기시대를 말하는 화살촉, 돌도끼를 비롯한 고인돌과 고려때 지석묘들도 발견되었지만 왜적과 해적들로 인하여 공도(空島)시기가 있어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선조들이 섬에 들어온 시기는 임진왜란(1598년)이후 1600년초로 족보를 통해 확인된다.

조도사람들이 서양문물을 접했던 사건으로는 1714년 조도사람들 9명이 표류하다 17일만에 일본 오끼나와에 표착했다가 중국을 통해 귀국한 9명에 대한 심문기록이 숙종실록, 1758년 대만 표류, 1899년 일본 표류등 표착하여 조도사람들의 외국 문물을 접하고 활발한 어업 활동을 했음을 가늠 할 수 있을 정도다.

한편, 서양에서 조도문물을 접했던 사건으로는 1816년으로 200년전 영함(英艦)을 호위하던 호위함(리라호)의 바실홀(Basil Hal)함장의 왕실보고서에서 조선인들과 영국인들이 서로를 관찰한 것처럼 역사서가 후대에 전달되고 있는데 조도사람들의 생활상이 서양에는 조선의 모습으로 전달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또한, 섬지역이지만 조도지역이 서양문물에 대한 거부감이 덜한 이유로는 1866년 천주교의 정착 동구리와 창리에 선교당으로 시작되었고, 1898년 목포산정동 초대 프랑스신부(도예)(1898~1909)가 판공성사 차 제주에 갔다 오다 풍랑으로 동구리 방문 이후 공소 개설함으로써 카톨릭 역사가 150년에 이른다.

최근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고 처럼 대형해난 사고가 끊이지 않는 지역으로 1968년 병풍도에 부디쳐 우리나라에서 기름 해양유출 첫 피해지역으로 국제항로(매물수도)와 국내항로(맹골수도)가 있어 수많은 선박의 통항로로 우리나라에서 조류가 빠른 해역이다.

지난 해난사고는 1947년 전복사고 7명사망, 1957년 채취선 14명 사망 나루선 15명 사망 전복사고, 1966년 6명 전복사고, 1973년 한성호 61명 사망 전복사고, 1978년 어선 3명 실종, 1980년 어선 3명 조난, 1988년 어선 1명 익사, 1990년 어선 4명 실종, 1996년 어선 3명 실종 등 해난사고 유난이 많이 일어난 지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에서 조도주민들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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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해 역사에서 조도주민들은 중심에 있었다.

이곳은 흔히‘새떼’처럼 섬이 흩여진 곳이라 조도(鳥島)로 풀이하기도 한다. 이 지역의 조선시대 행정구역이름은 여러섬이란 뜻의 제도면(諸島面)이었으나 1895년 비로소 지금의 행정구역 이름인 조도면(鳥島面)이 창설되었다.(칙령98호,1895년5월26일)

조도관내 섬에서는 돌화살촉, 돌도끼,빗살무늬토기 매장 또는 밭등지에서 발견되었고 석기시대 고인돌과 고려때 무덤들도 발견되고 있지만 왜적과 해적들로 인하여 공도시기가 있어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선조들이 섬에 본격적으로 입도한 시기는 임진왜란(1598년)이후 1600년초로 보고있다.

전남 진도군 조도면에서 서양문물을 3일간 접했던 시기가 1816년으로 200년에 이르고 카톨릭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는 1866년으로 150년 가까이 이른다.

영함(英艦)을 호위하던 호위함선중 하나인 리라호의 바실홀(Basil Hal)함장의 왕실보고서에서 나오듯 조도견문 내용에서 조선인들은 영국인들이 자신들이 관찰한것처럼 서로 서양인들을 관찰하였던것을 역사서 기술하여 후대에 전달되고 있는데 조도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상 기록으로 인해 그시기의 생활상이 기록 전달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한편, 도서지역이지만 조도사람들이 서양문물에 대한 거부감이 덜한 이유로는 천주교의 정착이라 하겠다.

1866년 무안 몽탄 천주교회 박원기 부부가 동구리 668번에서 살면서 전교를 시작하고 신자 장봉헌(다두)이 창유리697번지에 초가 3칸을 건축 선교당으로 시작되었고, 1898년 목포산정동 초대 프랑스신부(도예)(1898~1909)가 판공성사 차 제주에 갔다 오다 풍랑으로 동구리공소에 머물면서 이후 1900년 목포 산정동 초대 신부(도예)가 조도 창리, 조도 동구리, 지산 인지리에 공소 개설함으로써 카톨릭 전파가 본격화 되었다.

그리고 2002년 성유진길(아우구스티노)성당은 진도 의신,군내,고군,조도(9개공소 통합)성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이준한(토마)신부를 시작으로 제2의 부흥이 일어나면서 조도지역에 카톨릭은 뿌리깊게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