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골죽도등대 무종 재설치

목포지방해양수산청은 “진도군 조도면 맹골죽도 주민들과 섬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지역관광 활성화를 위해 맹골죽도등대의 무종을 6월 3일 재설치 했다”고 밝혔다.

일본이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수탈한 곡식을 영산강 통해 일본에 운송하기 위한 중요항로에 위치하여 1907년 맹골군도의 북쪽섬 대섬(竹島)에 높이8.5m, 광달거리21해리(38.89㎞)로 최초 등대 설립 당시 공식 명칭은‘대한제국 탁지부세관 공사부 등대국 죽도등대’로 석유백열등 등대를 세워 불을 밝힌지 올해로 112년째 꺼지지 않고 국제선박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맹골죽도등대 무종은 1950년대 높이78㎝, 지름38㎝로 제작·설치돼 안개에 묻혀 등대 불빛이 보이지 않을 때면 소리로 위험을 알리기 위해 타종시설인 무종(霧鐘)시설도 함께 갖췄던 등대로 맹골수도에 통항하는 국제선박들에게 등대위치를 50년 동안 알려주는 역할을 수행하다 이후 전자식으로 교체되면서 2013년 포항에 위치한 국립등대박물관에 기증되어 전시되어 오다 6년만에 제자리로 돌아오게 됐다.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보다는 4년 늦었지만 목포 관리 해역에서는 맨 처음 생긴 유인(有人)등대로, 목포지방해양수산청이 지난 2009년 원격 조종이 가능한 최첨단 시설을 갖춘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의 주요 무인등대로 전환 되면서 무종의 역할은 없지만 그동안 꾸준한 스토리텔링을 하여 무종을 보기 위해 방문하는 방문객들이 상당했고 역사적 의미가 있는 무종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염원이 이뤄진것이다.

특히, 맹골죽도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여 빼어난 자연경관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감성돔 낚시터로 관광객 및 낚시객들이 꾸준히 찾는 관광명소인데 이번 무종 재설치로 인하여 섬을 찾는 관광객이 더욱 증가 할 것으로 기대된다.

안효승 진도항로표지사무소장은 “등대관련 해양문화 콘텐츠 발굴 일환으로 섬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많은 국민들이 보다 다양한 등대문화를 체험 할 수 있는 기회의 장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의섬 독도를 말하다.

한국의섬은 올바른 섬의 정보를 제공하고 대한민국의 섬들을 올바로 홍보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관심을 갖는 것이 내가 살고 있는곳이기에 전라남도 섬 위주로 홍보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대표 섬 독도와 대마도에 관심은 많으나 개인이 활동하기란 쉽지 않지만 독도는 한국의섬을 운영하는 목적중에 하나다.

그런전차로 독도에 관하여 전문가가 아니라서 국민으로 ‘독도’에 대하여 알아보면서 주장을 해본다.

먼저, 독도의 날은 2000년 8월 민간단체인 독도수호대가 고종이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정하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제정한 1900년 10월 25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하였다.

그리고 2012년 10월 28일 국가해양부는 국가지명위원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동도의 봉우리를 우산봉, 서도의 봉우리를 대한봉이라 명명하였고, 바위로 분류되던 것은 탕건봉으로 재분류해 독도는 3개의 봉우리를 가진 섬이 되었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본다면 1899년 울릉도의 산림 채벌권을 가진 러시아가 대한제국 정부에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울릉도의 삼림을 벌채해 가고 있으니 이를 금지해 달라고 외교 문서로 강력하게 항의해왔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이를 금지함과 동시에 울릉도 이주민에 대한 행정 관리를 위해 1899년 5월 배계주를 울릉도 도감(島監)으로 재임명하여 파견했다.

또한 러시아측과 일본측의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 배계주와 함께 부산항 세무사로 근무하고 있던 외국인 세무사를 동행시켜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 실태를 조사 및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1899년 5~6월 당시 울릉도에는 수백 명의 일본인들이 집단적으로 불법 침투하여 촌락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울릉도의 삼림을 지속적으로 벌채하여 선박을 통해 일본으로 운반해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곡식을 비롯한 각종 재화의 밀무역도 폭력적으로 자행하고 있었다.

울릉도 도감 배계주는 이와 같은 사실의 보고와 함께 울릉도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들 일본인들에 대한 중앙 정부 차원의 강력하고 적극적인 조치를 요청하였다. 이러한 실태를 보고받은 대한제국 정부는 주한 일본 공사를 불러 울릉도에 불법 밀입도한 일본인들의 본국 귀환은 물론, 밀무역을 자행한 죄과를 ‘조일수호조규’[1876] 약정에 의거 조사·징벌하여 그 폐단을 영구히 근절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에 대해 일본 공사는 이 경우 한국 관헌이 체포하여 가까운 일본 영사에게 넘기도록 되어 있다는 ‘조일수호조규’의 규정을 내세워 책임을 회피하였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근본 대책 수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899년 12월 내무관리 우용정(禹用鼎)을 울릉도 시찰위원으로 임명하여 일본 측과 제3국 외국인을 포함한 조사단을 파견하여 일본인의 불법 자행의 실태를 재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1900년 우용정(禹用鼎)을 그 대표격인 시찰위원으로 하고 감리서(監理署) 주사 김면수(金冕秀), 부산 해관 세무사 라포트(E. Raporte) 및 봉변(封辨) 김성원(金聲遠), 그리고 부산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 부영사관보 아카쓰카 쇼스케[赤塚正助] 및 경부(警部) 1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이 5월 31일 울릉도에 도착하여 6월 1일부터 5일간 세무사 라포트의 입회 아래 그 실태를 조사하였다.

조사 이후 대한제국은 울릉도·독도에 대한 행정 관리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 수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 지역에 대한 관제의 개정 및 격상을 단행하였다. 즉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를 1900년 10월 24일 강원도 울도군으로, 그리고 기존의 울릉도 도감을 울도군 군수로 격상시키는 관제 개정을 단행하여 공표하였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독도 역시 울도군 군수의 관할 하에 두었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41호에는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를 관할하게 한 기록으로 ‘석도’는 돌로된 섬이라는 의미로 전라도에서 독도로 이주한 초기 이주민들이, 전라도 방언으로 돌을 ‘독’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기인하여 돌도가 지금의 ‘독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것이다.

더 오래된 역사적 기록으로 삼국사기에는 512년(신라 지증와 13년) 군주 이사부가 울릉도를 중심으로 해상왕국 우산국을 정벌하면서 독도가 우산도(于山島)로 불렸다, 1432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우산과 무릉 두섬은 날씨가 맑은 날 서로 바라볼수 있다고 되어 있다.

한편, 독도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조경(潮境)수역으로 플랑크톤이 풍부해 다양한 어종이 분포하고 있다.

또한, 독도를 분쟁화 할려는 일본의 영토 침략행위의 목적으로는 해양영토의 야욕과 함께 해저에는 미래에너지 자원으로 메탄이 주성분인 천연가스가 얼음형태로 고체화된 하이드레이트가 다량 매장되어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런 독도의 가치를 안다면 시대의 악마족속인 일본 침략세력과 동급인 다까기마사오를 우상으로 모시는 곳에서는 독도를 말할 자격이 없으며, 일본의 앞잡이를 후손에게 자랑삼아 가르치는 꼴이니 통탄할일이다.

올바르지 않는 역사관으로 무장된 아직도 정신 못차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 정상적인 나라가 될려면 박정희 팔이가 없어져야 하며 국내에서 먼저 독도의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고서 일본에게 독도가 우리땅이라고 주장 할 수 있다고 본다.